이번 대회의 취지문에서 “2024년 제12회 대회의 슬로건인 ‘파국의 낭만화를 넘어’는 위기의 시대와 그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왜 여전히 맑스주의를 요청하고 있는지에 대한 간명한 요약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자명한 이유에 대해 질문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그동안의 한국에서의 맑스주의 학술운동의 위기에 대한 사회적 좌표를 찍는 행위이다.
2024년 제12회 맑스코뮤날레의 취지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맑스코뮤날레’의 이름으로 대회를 지속한다는 것은 이름이 가지고 있는 역사를 계승한다는 것이고, 또한 맑스주의 학술운동을 매개할 하나의 구심이 필요하다는 사명을 떠앉는 것이기도 하다.” 위기가 반복되고, 실패가 거듭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논해야 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며 “왜 맑스주의인가?”, “왜 맑스주의를 구심으로 공통지반을 구축해야 되는가?”이다.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전제는 사회, 경제, 정치적 현상을 부분적으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시스템 내에서 상호작용하는 요소들의 관계를 분석하는 데 있다. 여기에서 전체성은 단순한 총합이 아닌, 그 내에서 각 부분이 필연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상호의존하는 유기적 구조로 이해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분적 분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여러 사회적, 경제적, 물질적, 정신적 현상들의 총체성을 통해 공통지반을 세울 구심점을 모색해야 되는 과정 앞에, 현재시점에서 총체성을 사유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적 도구는 사실상 맑스주의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취지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맑스주의는 이 지점에서 요청된다. “그러나 벤야민이 맑스주의의 이명(異名)으로 내세운 예술의 정치화가 ‘정치의 예술화’의 동전의 양면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급진적 정치 역시 일반화된 위기와 파국에 의해 조건 지워져있다는, 대단한 긴장 위에 자리한다. 따라서 긴장의 감각 속에서 시대의 감성을 읽어내는 젊은 감각이 필요하며, 그러한 젊은 감각으로 맑스주의 학술운동을 재사고해야 한다는 이중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교착상태에 놓인 채 공멸을 향해 나아가는 듯한 시대를 안고 맑스코뮤날레 개최가 20년이 지난 지금, 기존 세대와 함께 새롭게 등장하는 젊은 세대가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공통지반을 마련하는 것이 맑스코뮤날레의 핵심과제일 것이다.
지난 2023년 제 19회 맑스코뮤날레 <위기와 비판>에서 등장한 영-코뮤날레 연구자들은 저마다 다른 자유주제의 연구문을 발표하였다. 이 뜻은 즉 젊은 연구자들이 “맑스코뮤날레”에서, “위기와 비판”이라는 슬로건 아래 자신들의 연구를 위치시켰다는 것이다. 젊은 연구자들의 급진적이며, 다양한 연구 주제 선정과 발표를 통해서, 앞으로 맑스코뮤날레가 수행해야 할 역할이 시사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영-코뮤날레로 호명됨에 따라 젊은 감각으로 새로운 맑스주의적 실천을 개선하기 위하여 맑스주의 학술운동을 재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시사점은 맑스코뮤날레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역사를 계승해야 되는 이유를 선명히 한다. 그 이름 안에 새로운 역사가 이미 등장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맑스코뮤날레의 과제는 첫째, 맑스주의를 매개로 지금의 ‘비판의 위기’를 목격할 비판적 담론을 찾아야 된다. 둘째, 이 사회의 병리적 증후를 함께 읽어낼 공통지반이 필요하다. 셋째, 맑스주의라는 총체성의 관점에서 지속가능한 미래의 시간성을 회복하며 학술운동의 재생산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혁명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동전의 양면이 뒤바뀌어 멈추는 파괴적인 현상이 아니다. 2024 대회 슬로건인 ‘파국의 낭만화’와 ‘낭만의 파국화’라는 동전의 양면이 돌아가는 가운데,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 계급 투쟁, 그리고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강력한 분석 도구로써, 맑스주의를 다른 방식으로 호출하며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는 동전의 회전축을 지켜보아야 한다.
한편, 공통지반으로 모인다는 것은 단순히 같은 사상을 공유하거나, 결속된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각자가 처한 자리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투쟁을 이어나가는 이들이 모여 새로운 논의를 마련하고 서로의 목적을 공유하는 공감각적 장소로써 기능하는 것이다. 파편적인 담론을 한 곳에 모아 새로운 공통지반을 건축함에 있어 가장 유용한 틀이 맑스주의일 것이라는 기대에 맞게 파국의 낭만화의 저너머에서도, 우리는 새롭게 나아가야할 길을 모색할 것이다. 그리하여 맑스주의를 논함에 있어서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문제 앞에 놓여 있다. 2024 제 12회 맑스코뮤날레 <비판의 위기: 낭만의 파국화를 넘어>를 개최하며, 이 지점에서 다시금 맑스주의자들에게 묻는다.
‘왜 우리는 맑스주의 아래 모여야 할까?’
이번 2024 제 12회 맑스코뮤날레에서 시험하는 맑스주의 아래 총체적 이해의 시도는 부분적 설명이 아닌, 사회와 역사의 전체적 변화를 통찰할 번역(translation)의 힘을 갖기 바란다. 맑스주의 학술운동을 단순한 이론적 틀에 그치지 않고, 현실의 구조적 모순과 그 변화의 실천적 운동으로 분석하여 대응함에 중점을 둔다는 점에서 총제성 아래의 여러 연구자, 활동가, 예술가, 일반시민을 포괄하여 공통지반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맑스코뮤날레 제 20주년을 기념하며 맑스코뮤날레의 지속가능한 새로운 모델을 모색하고자 이 자리에 모였다. 그러므로 위기의 시대에 맑스주의 분석이야말로, 비판의 위기 앞에 새로이 써내려가야 할 때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즉시 하야하라!**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정권은 헌법적 정당성을 무시한 채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는 단순한 권력 남용을 넘어, 대통령의 발화 권력이 지닌 정치적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행위다. 대통령의 언어가 가진 상징적 권력과 그로 인한 폭력적 효과는 국민을 공포와 혼란 속에 가두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었다. 발언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곧 행위이며, 현실에 변화를 가져오는 권력의 도구다. 윤석열 정권의 비상계엄 선언은 이 점에서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정치적 폭력이자 독재의 귀환을 알리는 신호였다.
더 이상 대통령의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발화권력에 놀아날 수 없다.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어떻게 전체 사회를 휘두르고 국민의 삶을 위협할 수 있는지를 똑똑히 보았다. 이 사태는 권력의 언어가 민주주의의 원칙과 얼마나 상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 사례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폭력의 사슬을 끊고,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다시 일어선다.
억압의 언어가 우리를 침묵시키려 할수록 우리는 더 큰 목소리로 외칠 것이다. 대통령의 언어가 무책임하게 휘두른 공포에 맞서 우리는 연대의 언어를 만들고, 저항의 언어로 응답할 것이다. 독재적 권력의 상징을 해체하고, 진정한 민주적 언어와 행위를 되찾기 위한 투쟁에 나설 것이다.
“폭력을 뚫고 다시 살아난 얼굴들을 떠올렸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새로 짓는 길을 떠올렸다. 그 길 끝에서 우리는 마주할 것이다. 이렇게 끝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강, <소년이 온다>)
우리는 이 땅의 이름 없는 자들, 잊힌 자들, 그리고 쓰러진 자들의 목소리를 대신하여 나아간다.
2024년 12월 4일 맑스코뮤날레 사무국